필로 미니멀리즘, 세대를 건너 두 하우스로
2027년 봄여름 파리 컬렉션이 9월 28일 막을 올렸다. 10월 6일까지 9일간 이어지는 이번 시즌 공식 일정에는 101개 브랜드가 이름을 올렸는데, 숫자만 보면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안쪽을 들여다보면 흐름이 분명히 바뀌고 있다. 공식 쇼 외에 팝업과 프레젠테이션, 전시회 같은 오프스케줄 행사가 눈에 띄게 늘었고, 파리로의 쏠림 현상이 매 시즌 강해지는 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시즌에는 두 헤리티지 하우스가 새 디자이너의 첫 컬렉션을 공개한다. 쿠레주와 카르뱅이다. 두 브랜드 모두 창립자의 이름값이나 파격적인 신예 발탁 대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니멀리즘 계보를 이어받은 인물을 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매 시즌 새 얼굴이 등장하는 일 자체는 새삼스럽지 않지만, 이번 두 데뷔가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옷장에 오래 걸려 있어도 질리지 않는 옷을 만드는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다. 유행을 좇기보다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의 계보가 세대를 넘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이번 시즌이 시험대에 올린 셈이다. 패션위크는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열리는 하나의 계절 의례지만, 그 무대에 누가 서느냐에 따라 앞으로 몇 년간 옷장을 채울 기준이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즌 개막은 단순한 신작 공개를 넘어, 오래갈 디자인을 어떤 사람에게 맡길지를 업계 전체가 다시 묻는 자리이기도 하다.
무엇이 달라졌나
쿠레주는 아티스틱 디렉터로 드루 헨리를 새로 맞았다. 헨리는 피비 파일로 시대의 셀린느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뒤 JW 앤더슨, 다니엘 리가 이끌던 버버리, 마이클 라이더의 셀린느를 거치며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특정 하우스 하나가 아니라 파일로의 미니멀리즘이 여러 갈래로 퍼져나간 흐름 자체를 몸으로 통과해 온 셈이다. 그가 이끄는 쿠레주의 첫 쇼는 현지시간 9월 30일 오전 10시 30분, 한국시간으로는 같은 날 오후 5시 30분에 열린다. 카르뱅은 방향이 조금 다르다. 생 로랑에서 약 10년간 우먼즈웨어 헤드 디자이너를 맡았던 카이 라파엘 네셀라트가 새 디자인 디렉터로 부임해 현지시간 10월 1일 오후 12시 30분, 한국시간 오후 7시 30분에 데뷔 쇼를 연다. 한 하우스의 여성복 전체를 오래 책임져 온 인물이 파리의 또 다른 하우스로 자리를 옮기는 흐름이다. 여기에 지난 시즌 다른 나라에서 쇼를 열었던 발렌티노와 메종 마르지엘라, 아예 쇼를 건너뛰었던 사카이와 카사블랑카도 이번 시즌 파리로 돌아온다. 신규 진입 브랜드로는 아프리카 전통 모티프를 모던하게 재해석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발 막소사 아프리카, 전직 패션 저널리스트가 만드는 프랑스 캐시미어 니트 브랜드 알렉산드라 골로바노프, 아제르바이잔에 뿌리를 둔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출신 디자이너의 피단 노브루조바가 공식 일정에 새로 이름을 올렸다.
왜 지금인가
파리 패션위크로의 쏠림은 하루아침에 생긴 흐름이 아니다. 공식 스케줄에 오르는 브랜드 수 자체는 크게 늘지 않았는데도 오프스케줄 행사가 계속 증가한다는 것은, 파리라는 무대가 갖는 국제적 영향력이 그만큼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발렌티노와 마르지엘라가 다른 도시에서의 실험을 접고 파리로 복귀한 것도, 사카이와 카사블랑카가 쉬었던 쇼를 재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흥미로운 지점은 디자이너 인선의 방향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대형 하우스가 파격적인 신예를 앉히며 화제성을 좇았다면, 쿠레주와 카르뱅은 반대로 갔다. 헨리는 파일로 시대 셀린느에서 시작해 앤더슨, 다니엘 리의 버버리, 라이더의 셀린느까지 미니멀리즘 계보 안에서 경력을 쌓아 온 사람이고, 네셀라트는 생 로랑에서 거의 10년을 여성복 헤드로 지내며 브랜드 하나를 오래 책임진 사람이다. 둘 다 낯선 얼굴이 아니라 검증된 안목을 데려오는 선택이다. 화제성보다 지속성을, 반짝 이슈보다 오래 유지되는 디자인 언어를 택한 흐름은 소비자들이 유행에 지쳐 있는 지금 시점과도 맞닿아 있다. 계절이 바뀌어도 옷장에서 밀려나지 않는 옷을 만드는 사람에게 하우스를 맡기는 결정은, 결국 오래갈 것에 대한 산업 전체의 베팅이기도 하다.
다음에 볼 것
가장 먼저 확인할 지점은 쿠레주의 첫 쇼다. 9월 30일 현지시간 오전 10시 30분, 한국시간 오후 5시 30분에 공개되는 이 컬렉션에서 헨리가 브랜드 고유의 1960년대 스페이스에이지 헤리티지를 얼마나 살릴지, 아니면 자신이 거쳐 온 파일로 계보의 절제된 미니멀리즘을 더 진하게 가져올지가 관전 포인트다. 이어 10월 1일 현지시간 오후 12시 30분, 한국시간 오후 7시 30분에는 카르뱅의 데뷔 쇼가 이어진다. 생 로랑에서 다져진 네셀라트의 감각이 카르뱅 특유의 경쾌한 파리지엔 정체성과 어떻게 만날지 지켜볼 만하다. 개막일 흐름도 참고할 가치가 있다. LVMH 프라이즈 그랑프리 수상 브랜드 줄리 케겔스가 '중력'을 주제로 오프닝 쇼를 열었고, 첫날 마지막 순서였던 마티에 페칼은 레퓌블리크 광장의 마리안 동상 주변을 봉쇄하고 99명의 모델이 등장하는 3부 구성의 쇼를 선보였다. 실험적인 신진 브랜드부터 오랜 전통의 하우스까지 한 무대에서 부딪히는 이 스펙트럼이야말로 이번 시즌 파리가 던지는 질문이다. 10월 6일 폐막까지 남은 일정에서 얼마나 많은 하우스가 유행이 아니라 오래 남을 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트는지, 그 흐름을 계속 따라가 볼 만하다.



